길가에 바늘.
rubber.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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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12. 23:56 카테고리 없음
몇가지 일들이 있었다. 가장 큰일은 "우리 어빠들 음악이 어때서? 잘난 니가 만들어봐라"라는 류의 댓글이 수백개쯤 달리게 되는 글을 썼다는 것. 결론적으로 말하자만, 그정도의 비평(내지는 비판, 혹은 감상)은 그 코너에 글을 올리면서 삼주에 한번정도는 나오는 매우 평이한 수준의 악평이었다는 것. 단지 그 대상이 "우리 어빠들"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것이다. 좋다. 나도 좋아하는 뮤지션이 있다. 게다가 사실 매우 편협한 사람이라서 好不好의 문제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절대적인 영역과 취향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사실 "우리 어빠들"을 옹호하는 그네들의 심정을 백번 이해한다. 나 역시 누군가의 "빠"라는 것을 몇차례 경험하였고, 우리 어빠들 외치는 일반적인 그들이 상상할수도 없을 만큼의 돈을 쏟아 붓기도 한다. (단순히 어빠들 씨디 감상용 1장, 소장용 1장 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본질적인 문제는 "니네 어빠들"의 음악이 딱 그정도, 즉 대한민국 A급 아이돌의 평균치밖에 안된다는 것이고, 부수적인 문제는 내 취향상, 평균치의 보편적인 댄스(혹은 그네들이 힙합이라 부르지만,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 그런 음악)에 6점 이상 준다는 사실이 매우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아이돌 음악을 좋아한다. 게다가 그 어빠들 멤버중 한명은 나도 무척 좋아한다. 그 무대매너, 스타일, 재능. 감히 현재 한국 아이돌씬에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다. 대단한 가수가 맞다. 하지만, 그래도 7점이다. 왜냐면 21세기 한국에서는 (적어도 내 기준에서) 그보다 훨씬 멋진 음악들이 많기 때문이다.

평론가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한다. 음악을, 영화를, 서적을, 그리고 그외 많은 것에 대한 글을 쓰고 말을 한다. 나는 현재 몇몇 이유때문에 그러한 종류의 일을 약간 하고 있지만, 적어도 내가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재미있어서. 글쓰는 행위가 나에겐 소소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물론 약간의 금전적인 보상도 그렇긴 하지만) 그럼, 평론가의 평론은 항상 공정하고, 객관적인가? 이 물음에 대해 나는 나의 짧은 경험,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온 많은 평론들을 분석해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그 생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취향의 차이는 반드시 존재하며, 100%의 동의를 얻을 수 없는 글이다. 물론 그 개인적인 견해의 바탕에는 사실에 대한 어느정도의 이해가 필요하지만, 그냥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글로 쓴다면 그건 그냥 앨범, 혹은 노래에 대한 팩트일 뿐이다.

어빠들을 존경하는 수많은 "빠"들, 그리고 그외 문화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잘못중에 하나는, 평론가가 절대적이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모 유명 평론가가 우리 어빠들 이번 앨범은 감성적인 일렉트로닉 음악에 어빠들의 젊은 피를 수혈한 21세기 일렉트로닉 힙합의 결정체라고 했어" 라는 개인적인 사견을 절대적으로 믿을 순 없다. 같은 음악에 대해 다른 평론가는 "그들의 음악은 지금까지 오버/언더그라운드에서 지속적으로 확인 가능했던 전자음을 통한 그루브를 답습함으로써 발전없는 아이돌 댄스 뮤직이라는 오명을 얻었다"고 말할수도 있다. 이건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시험 문제로 나오진 않는다. 이건 감성의 문제이고, 취향의 차이이다. 나의 선택이 너의 선택과 다르듯이 나의 감상은 반드시 너의 그것과 다르다. 단 1%라도 다르다. 

모든 평론가가 전문적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평론에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은 흔히 말해 인터넷 검색을 하면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피상적일 경우가 많다.(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어떤 평론은 굉장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 전문적인 지식 역시, 배우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그 전문적인 지식과 평론하려는 대상(혹은 팩트)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유연하게 둘을 이을 수 있는 재간이 필요하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매우 독창적인, 때로는 억지와도 같게, 그리고 과하게 현상을 표현하기도 하는 취향의 차이가 그 기본이다. 그 사실은 절대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평론가는 자신의 취향을 바탕으로 대상을 감상하여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평론가가 니네 어빠들처럼 댄스도 출수 있고, 랩도 잘하고 옷도 잘입으면 왜 평론가하겠는가? 그냥 가수하고 말지. 그들이 잘하는 것은 바로 그 주관적인 평론이기 때문에 그걸 하는 거다. 그러니까 정말로 댓글에 "그렇게 잘난 니가 대신 만들어봐, 우리 어빠들 음악이 뭐 어때서" 라고 달지 말자. 그런말 해봐야 못만드니까, 그치만 잘난 어빠들이 다음 앨범 들고 나오면 다시 한마디는 할수 있다. 그게 평론가니까.
posted by rubber.soul
2011. 2. 9. 22:06 카테고리 없음

아직까지는 생소한 이름의 Joshua Radin 이라는 뮤지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력이 꽤 화려하다. 그의 음악이 쓰인 티비 프로그램, 드라마나 영화만 해도 70여개, Grey's Anatomy, 가쉽걸과 같은 인기 드라마는 물론 아메리칸 아이돌 같은 유명 프로그램에서도 그의 노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6년 데뷔 앨범 <We Were Here>를 발표한 이래 총 3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발매한 길지 않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종소리와도 같은 차분함이, 그리고 그의 가사에는 내리는 빗방울과 같은 자연스러움이, 그의 멜로디에는 진솔한 무언가가 담겨져 있다. 

실연으로 인해 받은 느낌들을 곡으로 써내려간 첫 앨범은, 그가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고 나서 처음으로 만든 곡들이 담겨져 있다. 보다 서정적이며, 지극히 개인적으로, 매우 감상적인 한 사람의 감정을 듬북 담은 이 앨범은 이례적으로 Itunes Store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발매 당시 롤링스톤誌에서 별 네개를 받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폴 사이먼"이라고, 다른이는 "21세기의 밥 딜런"이라고 표현히가도 한 그의 음악은 근래에 보기 드문 진심을 담은 포크 음악이었다. 목소리와 기타만으로 보여주는 맑은 속삭임은, 당연하지만 리스너에게 다음 작품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2년후에 발매된 <Simple Times>는 그런 기대감을 충분히 만족시켜주었다. 이 앨범은 전작의 좋은 점들을 잃지 않으면서 섬세하고도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는 처녀작을 거치면서 점점 음악에 익숙해지더니(?), 이 앨범을 통해 포크 음악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 무엇인지 놓치지 않고 전해준다. 어딘가에서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선을 지켜 음악을 절제하고, 발산한다. 그의 목소리는 찬란해지고, 음악은 더욱 차분하게 청자를 울린다. 포크라는 이름으로 지나간 많은 전설들에 비해서도 절대 뒤지지 않는, 오히려 구태의연하지 않게 21세기의 포크를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폴 사이먼이나 밥 딜런의 이름을 달지 않아도, 조슈아 라딘이라는 이름만으로 빛났다. 언제라도 훌륭한 음악, 이 앨범을 들으면서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예감했다면 나의 착각일까. 하지만 그래서 나는 이 앨범이 매우 희망적이었다.

작년에 발매된 <The Rock and The Tide> 앨범은, 그가 보여주는 또다른 모습이었다. 두장의 앨범에 비해 더욱 깊이감이 느껴졌고, 보다 거침없었다. 심플한 구성의 전작들과 달리, 알찬 밴드의 연주를 바탕으로 보다 컨트리 뮤직스럽게, 보다 락큰롤스럽게 전방위적인 장르적 심화를 보여준다. 하나하나의 곡이 굵은 선을 가지고 있다. 여러가지 시도들이 보여주는 그의 새로운 모습은 그의 음악을 보다 훌륭한 "포크"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앨범 제목처럼 보다 단단하고 거침없이 그 시도를 보여주는 그의 자신감은 "밴드"와 함께 풍성하게 귀를 즐겁게 해준다. 첫곡 <Road to Ride ON>으로 상쾌하게 출발하는 그의 새로운 세계는 그의 장기인 차분함과 함께, 전자음과 직선적인 통쾌함에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흥겨운 리듬감까지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음악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마지막곡인 <She Belong to Me> 까지 마치 그의 성장에 대한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 좋은 앨범이다. 물론, 그의 목소리가 주는 감격적인 순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썩 괜찮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기대해도 좋다는 작은 증거라 할수 있겠다.

덧. 재편곡된 <Brand New Day>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팬으로서 즐거움이라면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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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산 맥북으로 처음 작성하는 글. 조금 더 빨리 쓰지 못했던 것은 맥북 프로와 덕후질이 좀 길었기 때문이랄까.
posted by rubber.soul
2011. 1. 30. 23:15 카테고리 없음


오아시스(Oasis)는 90년대 영국 밴드 음악씬의 아이콘이다. 블러가 아무리 명민하고, 플라시보가 아무리 뇌쇄적이고, 심지어 라디오 헤드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고 할 지라도, <90년대 브릿팝=오아시스>의 공식은 리스너에게 매우 암묵적으로, 게다가 무의식적으로 새겨진 각인이다. 마치 가장 좋아하는 팝송은? 이라는 질문에 대해 즉각적으로 비틀즈의 <Let it be>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90년대를 살아온 밴드 키즈들에게 오아시스는 특별하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 정도가 더 하다. 심지어 전성기를 훨씬 지나고, 이제는 형제간의 초딩스러운 다툼으로 해제까지한 그들이지만, 양국에서는 여전히 갤러거 형제의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다. (물론 영미권에서도 그렇긴 하지만, 다른 뮤지션에 비해 훨씬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오아시스의 거의 대부분의 곡들 쓴 문제아 형제의 형인 노엘 갤러거에 대한 숭배는 매우 무조건적이다. 얼마전 모 사이트에서 했던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부분에서 많은 전설들을 제치고 2위를 기록, 여전한 인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노엘 갤러거. 인기 없던 동생 리암의 밴드에 가세해 밴드를 세계적으로 만들었다. 오아시스라는 밴드에서 리암의 목소리가 30%라면 나머지 70%는 노엘의 송라이팅이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성격이나 인간성을 따지지 않는다면) 노엘은 충분히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가 가졌던 거의 모든 것을 가진 몇 안되는 송라이터다. 유려한 멜로디 라인을 뽑아 낼 줄 아는 송라이터. 천재라는 단어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 뮤지션으로서 천재적이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대중성이다. 누구라도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 노엘은 그런 의미에서 천재다. 사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동생 리암은 '노래 조금 하는' 미운 오리 새끼였을지도 모른다. 형에게 좀처럼 인정받지 못하는 동생.

하지만, 이제 더이상 천재는 없다. 리암과 나머지 멤버들(앤디 벨, 겜 아처, 크리스 셰록)은 이제 오아시스가 아니라, 'Beady Eye' 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자신감에 넘쳤다. '우린 오아시스를 뛰어 넘을 것이다"라고 장담하던 리암은 첫 싱글 <Bring The Light>을 무료로 공개한다. 노래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오아시스보다 더 과거의 록큰롤을 들고 나올 줄 몰랐다는 것이 지배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하나더, 오아시스를 뛰어 넘긴 힘들겠다는 것이 청자의 전반적인 의견이었다. 썩 괜찮은 노래였지만, 사람들에겐 <오아이스 - 노엘 = 비디 아이>라는 공식을 더 확신시켜주었다. 더이상 천재는 없다. 그리고 반전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데뷔 앨범의 제목으로 정한 'Different Gear, Still Speeding' 라는 말처럼, 비디 아이는 오아시스와 같은 차원의 그룹이 아니다. 누가 더 고차원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선상에서 우열을 판별하기에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예전에 누군가 그랬다. "잘난 누군가가 혼자 만든 노래보다, 나랑 비슷한 네명이 만든 노래가 더 듣기 좋다"고. 청자가 바라는 것은 천재 자체가 아니다. 청자는 천재가 만든 유려한 노래를 바란다. 하지만, 그 유려한 노래가 굳이 천재의 머리속에서 나오지 않아도 청자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래 자체이지, 천재의 유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The Roller>가 발매되었다. 프론트맨 리암의 작곡도 아닌, 기타리스트  겜 아처의 곡이다. 하지만 노래는 적절한 빠르기와 꽤 괜찮은 중독성, 그리고 안정적인 역할 분배를 보여주고 있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곡이 나온것이다. 연주에선 흥겨움이 느껴지고, 결정적으로 리암의 목소리에선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감이 느껴진다. 자신에 대한 확신, 그리고 팀메이트들에 대한 확신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도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리암아, 넌 혼자 안돼, 얼른 노엘이랑 다시 합쳐." 혹은 "여전히 오아시스만 못하네" 등등. 그들에게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다. 과연 당신은 지금까지 오아시스의 노래를 들었던 것인가, 노엘이라는 천재를 들었던 것인가. 그리고 지금 당신이 듣는 것은, 미운 오리새끼 같은 외톨이 리암의 노래인가, 아니면  'Beady Eye'라는 온전한 밴드의 음악인가. 

결국, 좋은 노래는 오래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Beady Eye'의 <The Roller>는 첫단추로써 매우 만족스럽다. 이상하게 후렴구를 듣고 있으면 눈물이라도 날 것처럼 울컥한다. 천재를 잃은 (혹은 버린) 남은 이들의 노력이 느껴진다. '그래, 없어도 잘하잖아', 라면서 격려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칭찬까지 곁들여서 말이지.
posted by rubber.soul
2011. 1. 17. 17:30 카테고리 없음


suzumoku, 분명 우리에겐 익숙치 않은 이름이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에서도 인디 성향의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으며, 화려한 퍼포머도,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들어본다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1984년생, 이제 막 20대의 중반이 된 이 젋은 청년의 노래속에서는 早老라도 해도 좋을 만큼, 동세대와 이전세대를 아우르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들어 있다. 도저히 20대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의 차분한 가창과 세련된 기타 연주, 그리고 짙은 페이소스가 담긴 가사까지. 음악이 궁금하면 유튜브같은 사이트 찾아보면 많이 있다. 난 확신한다. 당신은 분명히 그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2007년 앨범 <コンセント(컨셉트)>를 발표한 이래, 이번 앨범까지 총 4장의 앨범을 낸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우연히 두번째 앨범 <プロペラ(프로펠러)>의 수록곡인 'レイニードライブ(레이니 드라이브)'를 들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를 처음 들었을때, "어라, 이 사람 정말 대단한 포크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자신의 목소리와 기타가 정확히 무엇을 향해 일치점을 보여야 하는지, 가볍지 않은 가사를 어떻게 해야 밝게 전달할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포크 음악인지,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노래로 들려주고 있었다. 이정도의 실력이라면 꽤 많은 나이겠군, 이라는 나의 생각과 달리, 20대 중반의 청년이 들려준 기적같은 노래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난 이미 그의 음악을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초기에 발표한 두장의 앨범에서 그는, 비대칭적인 현실을 노래로 표현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마치 한국의 70년대 저항가요처럼 그의 노래속에서는 현실의 직시와 부조리의 타파라는 큰 주제가 담겨져 있다. 야근에 지친 노동자, 지칠줄 모르며 뿜어나오는 공장의 연기, 어두운 귀가길 그리고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작은 고뇌와 기대감까지. 그는 노래를 통해 부조리의 타파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연장선상에 있는 두장의 앨범에 이어 2010년 발매된 세번째 앨범 <素晴らしい世界(멋진 세상)>에서도 이 청년은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현실은 사회가 아닌, 자신.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본 현실에 대해 노래한다. 물론 그 현실도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주체가 누구라도 현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는 눈앞에 펼쳐진 이 역설적인 '멋진 세상'을 노래한다. 

이번 앨범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주제 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운드는 풍성해졌고, 언어는 잘 다듬어졌으며, 장르적으로 더욱 다채로워졌다. 직설적이여야 한 부분에서는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가며, 우회해야할 부분에서는 효과적인 길을 찾아 돌아간다. 암울한 현실에 대한 노래가 있는가 하면, 희망적인 내일을 노래하는 곡도 있다. 지금까지처럼 그의 매력이 물씬 느껴지는 앨범이다. 물론 한살 더 먹은 만큼 그의 음악적 깊이가 한층 깊어진 것은 물론이다. 수록곡이 8곡 밖에 안된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물론 전작들도 다 그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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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아마 재즈 밴드 PE'Z와 함께 했던 pe'zmoku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꽤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페즈모크 이전에 suzumoku라는 멋진 송라이터라는 점. 잊지 말자.
posted by rubber.soul
2011. 1. 15. 14:14 카테고리 없음

보통을 가장한 비범한 3인조의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치열한 완벽주의

강한 부정은 긍정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이 있다. 반대로 말하면 강한 긍정은 부정의 다른 표현일것이다. 언니네 이발관이 보여준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앨범도 그 역설적인 의미를 빌어 해석하자면, 매우 보통이 아닌 (혹은 그 보통과 차원을 달리하는) 일상의 감각을 자연스레 보여준 앨범이요, 또한 그들은 보통을 가장한 매우 비범한 3인조라는 말이 될수도 있다.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때, 놀랬던 것은 바로 그 자연스러움이다. 전체적인 곡의 구성은 물론, 곡의 배치, 그리고 각각의 곡들에서 느낄수 있었던 것은 어느것 하나, 트집을 잡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보통의 존재의 삶과 사랑, 그리고 존재 가치에 대한 주제 의식, 그리고 곡 전반에 흐르는 그루브한 리듬 파트와 '기타톤' 하나까지 딱 맞는 톱니바퀴처럼 제단하여 마감질한 그 완벽주의. 물론 보컬 이석원의 목소리가 보여주는 다채로운 명장면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은 단순히 편안한 마음으로 음반을 녹음하고, 반쯤 노는 기분으로 구성을 정해서 나오는 보통의 자연스러움이 아니었다. 보통을 가장한 비범한 3인조는, 자연스러움을 가장해서 가장 치열하고, 세밀하게 세공된 완성품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음새를 찾을 수 없는 빛나는 골든볼처럼 "원래 그러한 것"과도 같이 "쿨"한 척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쿨한척 되게 멋지다. 백조가 물에 떠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다.

두번째로 놀라웠던 점은, 보통의 존재를 노래하기 위해 일상의 언어로 가장 일상적인 방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구성된 이 앨범이 청자에게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웅장함도, 그렇다고 터질듯한 폭발력도 아닌, 일상과 보통이라는 감각으로 소름이 돋는 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들은 보통을 가장해 그 어려운 일을 해냈고, 이 음반은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그 보통의 존재에 대한 삶과 사랑, 그리고 존재 가치를 치열하고 세밀하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결국 그것을 일상의 감각으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대단하다.

90년대 홍대 밴드씬은 꽤나 흥미로웠다. 그곳에는 열정과, 감성과 그리고 많은 재능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그 수많은 영웅들중, 우리에게 동시대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은 바로 "언니네 이발관" 뿐이다. 이 앨범은 더이상 언니네 이발관을 "푸훗"을 노래한 밴드가 아니라, "인생은 금물"이라는 곡을 노래한 밴드로 만들어주었다. 여전히 델리스파이스는 "차우차우"로 기억되고, 자우림은 "헤이헤이헤이"로 기억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밴드는 더이상 지나간 90년대 홍대 앞의 영광속에 살지 않아도 될 만큼, 대단해졌다. 90년대에 언니네 이발관이 보여준 모습과, 지금의 <가장 보통의 언니네 이발관> 중 어느쪽이 더 좋은지는 취향의 차이로 남겨두자. 중요한건 밴드가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는 것이니까. 가장 보통의 존재로써, 가장 일상의 감각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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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트에서 2000년대 베스트 앨범 100선을 뽑는데, 개인적으로는 언니네 이발관의 이 앨범, 혹은 My Aunt Mary의 <Just Pop>이 1위를 할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앨범 모두 10위안에 들기는 했지만, 1위는 장필순에게 넘겨주었다. 아쉬운 마음에서 작성한 글은 아니다. 다만,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때 짤막한 메모만 남겨 놓았던 것이 신경쓰여서 적은 것뿐. 사실 1위든 100위든 뭐가 그리 중요할까. 어차피 취향의 차이가 반일텐데. 하하.
posted by rubber.soul
2010. 12. 27. 18:34 카테고리 없음

몇해전, 전차남(電車男)이라는 일본 드라마는 수많은 오덕들의 공감을 한몸에 받으며, 영화로, 책으로 그리고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써의 아키바계(アキバ系)를 보여주고 모에(萌え)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많은 이슈를 낳았다. 그 드라마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이들이 하나 더 있으니, 엔딩곡을 부른 サンボマスター(삼보마스터)가 바로 그들이다. "世界はそれを愛と呼ぶんだぜ(세상은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구)"라며 21세기에 당치도 않게 사랑과 평화를 연호하던 이들은 그간 알만한 사람만 알던 실력 출중한 밴드에서 일약 아키바계의 대변인쯤으로 부각된다. (물론 본인들이 원하던 것은 아닐것이다) 물론 노래는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이들에게는 골수팬들의 비난이 쏟아지기도 하였다. 바로 록의 진정성이 없어졌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2003년 "新しき日本語ロックの道と光(새로운 일본어 록의 길과 빛)"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메이저에 데뷔한 이들의 음악은 충격적이었다. 전대의 일본 밴드 음악들(真心ブラザース, 奥田民生, ガガガSP 등)이 가졌던 일본 록을 향한 열정과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한 이들의 음악에는 "날 것"의 폭발적인 생명력이 있었다. 절규하는 보컬, 부스터(이펙터의 종류)만으로 그려내는 살아있는 기타음, 베이스와 드럼의 리드미컬함은, 예쁜 음악, 잘 만들어진 상품에 익숙해진 많은 이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리고 가사. 한국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영어 가사가 주를 이루었던 (그건 밴드 음악씬도 마찬가지) 일본에서 "そのぬくもりに用がある(그 따스함에 용무가 있다)" 따위의 고전적인 제목과 그에 상응하는 일본어 가사로 열창하던 그들의 모습은 (당연하지만) 많은 골수팬을 낳았다.

하지만, 두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サンボマスターは君に語りかける(삼보마스터가 너에게 말을 건다)"와 세번째 앨범 "僕と君の全てをロックンロールと呼べ(너와 나의 모든 것을 록큰롤이라 부르자)"를 거치면서 밴드는 분명히 변했다. 특히 밴드 최대의 히트곡 "世界はそれを愛と呼ぶんだぜ(세상은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구)"가 수록된 세번째 앨범에서 그들이 보여준 것은 데뷔 초기의 폭발적인 생명력보다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두를 감싸 안을 수 있는 포용의 음악이었다. 물론 그들의 장기인 날카로운 외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의 지향점은 "일본어 록의 부활"이라는 외로운 길에서, "사랑과 평화를 위한 만인의 록큰롤"의 전파로 바뀌어 있었다. 혹자는 (혹은 대다수의) 팬들은 이러한 변화를 매우 폄하했다. 록의 혼이 없어졌다느니, 진정성이 결여된 상업 음악이라던지. 많은 비난이 있었지만, 과연 그들이 세장의 앨범을 거치면서도 첫번째 앨범에서 보여준 원초적인 날 것의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혹은 그 에너지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그들과 팬을 위해 올바른 일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의 변화가 충분히 반가웠다. 세번째 앨범에서 난 그들에게 최대한의 만족감을 얻었다. 한곡한곡이 멋졌다.

물론 이후에 발매한 두장의 앨범 "音楽の子供はみな歌う(음악의 아이들은 모두 노래하지)"와 "きみのためにつよくなりたい(너를 위해 강해질꺼야)"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과 평화를 위한 만인의 록큰롤"의 연장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곡도 좋지 않은 곡도 있을 뿐이다.

데뷔 10년을 맞은 이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10년 10월 3일 시모키타자와의 클럽 쉘터에서 "あれから10周年オーディションライブ(그로부터 10주년 오디션 라이브)"를 개최한다. "이제는 오디션을 볼 자신이 생겼다"는 이유에서 낮 시간에 오디션을 빙자(?)한 공연을 했고, 그 음원은 온전히 이번 맥시 싱글에 실렸다. 총 8곡이 수록되었으며, 그 속에는 초기 그들이 가졌던 넘치는 생명력을 되새길수 있는 곡들도 있다. 팬으로써는 감사한 일이다. 싱글따위에 8곡의 라이브 음원을 수록해주다니 말이다.

10년. 그들은 변했다. 일본어 록의 부활을 외치며 거창하게 등장한 그들은 이제,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위한 록큰롤을 들려주기 위해 지금을 살아간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나는 그러한 변화가 좋다. 충격적인 데뷔 앨범에는 당시의 그들만이 보여줄수 있던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여전히 그것을 보여줄 의무는 없다. 아니, 보여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폭발력 대신 다른 것을 보여주면 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면 된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그들도 존 레논처럼 "사랑과 평화"를 전세계적으로 외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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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을 써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한가했는지 글이 길어졌음. 삼보마스터에 대한 과거의 몇가지 텍스트는 여기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물론 오래전에 쓴 텍스트들이라 지금의 생각과 좀 다를지도.)

posted by rubber.soul
2010. 12. 20. 22:00 카테고리 없음

지난 2010년 12월 19일. 저녁 6시. "브로콜리 너마저"의 2번째 스튜디오 앨범 발매 기념 앙코르 콘서트가 있었다. 공연전에 놀랐던 것은 두가지. 한가지는 예상(?)보다 엄청난 밴드의 인기.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추운 겨울 저녁, 관람객들을 야외에 줄 세우던 공연 기획사의 무능력함(!)이었다. 그렇게 스탠딩 300번대 초반 입장권을 가지고 우리는, <졸업>을 듣기 위해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공연은 너무 좋았다. 이들은 이제 "풋풋하고 신선한"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스쿨 밴드같은 부류가 아니다. 모든 곡들은 충분히 프로페셔널했다. 잘 정돈된 음향들. 기타톤 하나, 드럼 사운드 하나에도 신경을 쓴듯 귀에 거슬리는 부분따위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덕원의 목소리는 한없이 감동적이었으며, "계피"의 빈자리를 채우는 멤버들의 역할분담, 그리고 편곡(특히 보편적인 노래의 편곡!)으로 더이상 전(前) 멤버 계피와는 아무 상관없이, 밴드는 훌륭하게 자신들의 음악을 완성해냈다. 풋풋함을 잃지 않으면서 절대 방심하지 않았던 이번 앨범 <졸업>의 느낌과 마찬가지로 공연은 훌륭했다. (물론 공연 중간부분, 덕원의 무리한 관객 호응 유도 및 풍선 투척 등은 조금 과도한 설정이 아니었나한다. 하지만 연말이니까, 라면서 넘어가도록 하자)

공연에선 그들이 지금까지 발매했던 모든 앨범들에서 충분히 균등한 선곡이 이루어졌으며, 관객의 입장에서는 눈을 감고 그들의 음악이 지나온 일종의 역사(?)를 떠올려도 될 만큼 많은 곡이 연주되었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은 일반적으로 "위로의 음악"이라고 불린다. 삶에 지친 이들에게 안식을 주고, 모두 당신과 같이 외롭지만, 내가 있잖아.. 라며 청자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무엇에 대한 위로란 말인가? 각박한 삶, 실패한 사랑, 아련한 추억? (개인적인 견해로) 그 위로는 바로 "아직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어른들을 위한" 위로다.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을 위한 노래. 그것이 바로 그들의 음악인 것이다.

내년이 되면, 나는 조금 더 성장해서 어른스럽게 이별을 말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일에 성공하며, 풍족한 인생을 누리겠지, 라는 것은 21세기 대다수의 어른들이 희망하는 "내년의 소망"에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내년이 되면 올해보다 조금 더 세상에 적응하여, 즉 "어른스러워져서" 작년의 자신을 "꼬꼬마 친구" 보듯이 경시할 수 있는 어른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과연 그렇다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이들은 노래한다. 당신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될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들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다. 언제까지고 어른이 되지 못한 많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들려주기 위해 그 자리에서 계속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장을 거부하는 일종의 치기어린 마음만이 이들에게 존재하진 않는다. 첫번째 정규 앨범에 비해 훨씬 더 자신들의 감정과 이야기에 집중한 이번 앨범을 듣고 있으면,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밴드"로써의 지향점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80년대 대학 밴드 동아리의 풋풋한 촌스러움을 배제 한채, 세련된 사운드과 구성, 그리고 "지금"의 이야기를 담은 이번 앨범은 그래서 전작보다 훌륭하다.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잘 하고 싶은 것에 많은 것을 쏟아부은 느낌이다. 

"브로콜리 너마저"는 앞으로도 기나긴 여정을 가야하는 밴드이다. 아니, 언제까지고 계속 그 길을 따라 모든 어른들의 위로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밴드이다. 이런 느낌은 마치 90년대 "델리스파이스"가 <차우차우>를 부르며 충격(!)적으로 데뷔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그 신선함, 그리고 키치함은 이전까지의 모든 것과 달랐던 것이다. <보편적인 노래>를 처음 들었을때, 딱 그 느낌이었다. 그 풋풋함, 그리고 당돌함.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도 방식도 달랐지만, 그 느낌만은 비슷했다. 하지만 "델리스파이스"는 사실 지금, 없다. 5번째 앨범 <Espresso> 이후 그들의 음악은 기억나지 않는다. 신선함과 키치함의 유통기한은 딱 5장의 앨범까지였던 것이다."브로콜리 너마저"가 앞으로도 기나긴 여정을 가야하는 이유는 바로 그거다. 전작의 풋풋한 촌스러움, 이번 앨범의 세련된 위로송을 다음 앨범에서도 만나게 된다면 분명 이들도 언제까지고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의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대중과 타협하거나, 세상에 적응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지금처럼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채, 그 자리에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작년과는 다른 방식의 위로가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한살 나이를 먹고, 그들도 한살 나이를 먹는 것은 거부 할수 없는 사실이니까. 아무리 어른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세월은 흐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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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8. 22:48 카테고리 없음

물론 국카스텐(Guckkasten)은 처음부터 눈에 띄었다. 무언가로 규정할 수 없는 그들의 음악은 정말로 온전히 "국카스텐의 음악"이라고 표현할수 밖에 없었다. 말로 표현하기엔 그들의 음악은 너무 그들스러웠고, 다른 비교점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역시 실망은 없었다. 새 EP <Tagträume>을 처음 들었을때, 그 음악은 여전히 국카스텐의 음악이었고, 펄떡거리며 살아 숨쉬는 호흡 그 자체였다. 그들의 능력은 정말로 놀랍다. 날것을 효과적으로 정제하여 대중에게 전달하는 능력말이다.

100%의 개인적인 감정, 혹은 감상을 온전히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는 이 작업을 위해서 이들은 충분히 숙고하고, 노력한다. 그래서 청자는 들을 수 있다. 그들이 개인, 혹은 집단적으로 지니는 소규모의 경험과 감각을 온전히 들을 수 있다. 이정도로 100%의 날것과도 같은 감각을 전해주는 음악을 들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그 100%의 날것인 소규모의 경험과 감각이 불필요한 에너지의 소모없이 청자에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에너지의 집약인 경험과 감각이 원초적이고 심플한 방식으로 청자에게 전달된다면, 그걸로 족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전위예술이 그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들의 전달방식은 충분히 집약적이고 영리하다. 에너지의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가지 장치들을 사용하여 세분화된 에너지, 즉 감각과 경험을 분할해서 배치하고, 그 부분과 부분이 원래 하나라고 느낄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접착"한다. 참으로 집약적으로 원초적인 음악. 그것이 바로 내가 들은 <Tagträume>의 느낌이다.

극과 극으로 이어지는 이 앨범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다. 형식은 단지 그들의 경험과 감각을 온전하게 전하기 위한 수단일뿐. 정말 중요한 것은 날것을 효과적으로 정제해여 100%의 확률로 전해주는 그들의 능력. 그리고 그 온전한 날것을 감상할 수 있다는 즐거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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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튠즈 스토어에서 비틀즈 음반 다량 구매한 김에 오랜만에 비틀즈에 대한 글이나 더 써볼까 했는데, (서른살에 다시 듣는 비틀즈 음반별 리뷰라던가..) 국카스텐의 음반에 눈에 걸려서 한마디 안하고 넘어갈수가 없었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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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7. 22:56 카테고리 없음


21세기 마케팅의 화두는, 소비자 중심의 판촉. 그 중에서도 감성에 기대어 소위 "나도 모르는 지름"을 유발하는 것은 더없이 강력한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되었다. 한국, 특히 전자제품 분야에서도 감성 마케팅이라는 국적 불명의 단어는 어느새 하나의 효과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아날로그적인 제품 디자인, 전자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 그리고 오직 "내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유저 친화적인 면까지,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에 더없이 유효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구려 감수성에 동조하기는 쉽지 않다. 너도나도 비슷한 컨셉만을 내세우는, 마치 일부러 비슷한 모양으로 찍어내는 듯한 제품들, 그리고 예술작품들을 볼때 마다 "내 감성은 너의 그것과는 다르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런 현실속에서 정녕 감성 마케팅이란 무엇인지 보여줄 사건이 얼마전에 있었으니, 그게 바로 그 위대한 비틀즈(The Beatles)가 온라인에 입성한 바로 그날이다.

스티브 잡스는, 2010년 11월 17일이 잊지 못할 날이 될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날, 클라우드 서비스에 기반한 아이튠즈가 새롭게 선보일거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결국 그 잊지 못할 날은 비틀즈가 온라인 음원을 처음 공개한 날이 되었다. 아무일도 아니라고 실망한 사람들도 많았다. 고작 지나간 밴드의 음원이 스토어에 등록된 것뿐이라고 코웃음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지난 몇주간 비틀즈의 음반들은 챠트 상위권에서 꾸준히 팔려나갔다. 사람들은 이미 있는 비틀즈를 다시 샀다. 나 역시,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 7장의 음반을 다시 구매하게 되었다. 애플은 단순히 지나간 밴드의 음원을 판 것이 아니다. 비틀즈의 음원을 다시 사게 만든 것은, 그들이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이미 있는 것을 다시 사게 만드는 것. 그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게다가 그것이 전혀 대체품을 필요로하지 않는 영구한 것이라면 소비자의 손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감성에 의한 호소뿐이다. 이미 비틀즈의 음원은 온라인에서 (물론 불법이지만) 넘쳐나고, 집에 누구나 한두장쯤은 (One 앨범이나 앤솔로지라도) 그들의 음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스셋이 팔린다. 새롭게 마스터링된 음원, iTunes-LP를 통해 화면에 구현되는 음반 자켓을 비롯한 아트웍스. 그리고 앨범마다 들어있는 짧지만 강력한 도큐먼트 필름까지. 한번 보고는 도저히 사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이 방법에, 대다수의 음반을 가지고 있는 나 역시, 내 "아이폰"으로 비틀즈의 리마스터링된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성의 마비를 느끼며 순간적으로 음원을 구매했다. 내 아이폰으로 듣는 내 비틀즈 음악. 나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너무 충분했다.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강력한 판촉 수단에 당한 것이.

<Help>앨범부터 <Let It Be>까지 총 7장의 음반을 사면서 나는 내가 왜 그들을 좋아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었고, 그들이 왜 최고의 밴드인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다시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애플이 판건 단순한 음원이 아니었다. 애플은 감성을 자극하는 추억을 정말 멋지게 재포장해서 제공해주었고, 소비자는 그 어느 감성보다 더 위력적인 "추억"이라는 무기에 당했다. 물론 기분 나쁘게 당한것은 아니다. 그 추억속에서 자신을 보고, 또 나만의 비틀즈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멋진일이니까. 이정도면 충분히 돈 값한다. 아이폰으로 듣는 <Abbey Road>의 후반부 메들리가 얼마나 멋진가? 이럴땐 아이폰이 갭리스 재생을 지원해준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운거다.


posted by rubber.soul
2010. 12. 4. 12:53 카테고리 없음
한때 (물론 지금도 포함이지만) 미친듯이 열광했던 21세기 온라인 교제의 완결자, 페이스북, 그리고 좌파/마이너 정보 공유의 최첨단 수단(물론 개인적으로)인 트위터는 지금도 멋진 미디어임에 분명하나, 두 SNS를 시작한후 나 자신이 돈을 받고 글을 쓰는 일 이외에는 어떠한 장문의 글도 쓰지 않았음에 놀라는 중.

물론 주기적으로 긴글을 어쩔수 없이 써야되기 때문에 "글쓰는 법을 까먹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자발적으로" 글쓰는 법을 조금은 잊은 것 같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잡담을 썼던 것이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지는 나는 이상하게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글을 안쓰면 사는 것 같지 않던 20대의 치기어린 시절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잡담을 배설하지 않아도 잘 지낸다. 물론 우리에겐 무적의 트위터가, 그리고 어디서나 온라인인 수많은 아이폰용 메신저 어플들이 있기에 "장문의 잡담의 배설의 쾌락"은 즐거워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 더 잘 지내려고 한다면, 그리고 조금 더 즐겁게 살려고 한다면 역시 글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제는 좀 더 잘 지내기 위해 다시 블로그를 시작해야겠다. 당분간은 혼자서만 볼수 있는 공간으로. 아 배고파.
posted by rubber.soul